분노조절장애
같은 상황인데도 어떤 날은 참을 수 있고, 어떤 날은 크게 폭발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면 부족, 카페인, 스트레스와 몸에서 먼저 나타나는 신호가 분노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이 칼럼에서는 분노조절장애에 대한 사례와 한의학에서는 이를 어떻게 살펴 치료하는지 다뤘습니다.
"지난번에는 똑같은 일에도 그냥 넘어갔는데, 이번에는 왜 그렇게까지 화를 냈을까요?"
B씨의 아내가 진료실에서 한숨을 쉬며 말합니다.
마흔 한 살인 B씨는 최근 사소한 일에도 화가 갑자기 치솟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가족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세게 내려놓고 나면 금세 후회했지만, 비슷한 일이 다시 반복됐습니다. 며칠 전에는 숙제를 하지 않은 아들을 보고 화가 나 밥상을 주먹으로 내리쳤습니다. 울음을 터뜨린 아이 옆에서 속상해하며 B씨의 아내가 이야기합니다.
"어제도 똑같은 얘기를 했는데 그때는 그냥 넘어갔잖아. 오늘은 왜 그래?"
이렇게 일반적으로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분노의 폭발이 일어나며, 스스로 주체하기 어려울 때, 우리는 흔히 '분노조절장애'라고 부릅니다. 정신장애 진단 기준으로 널리 쓰이는 DSM-5에서 정식 진단명은 간헐적 폭발성장애(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입니다. 분노 조절에 문제가 있는 경우, 우선 B씨의 분노가 얼마나 자주, 어떤 식으로 터지는지, 그 정도가 상황에 비해 지나치지는 않은지, 생활에 어떤 문제가 생기고 있는지부터 확인이 필요합니다. 또 다른 질환이나 신체적 문제가 없는지, 아니면 어떠한 약물의 영향으로 인한 것은 아닌지도 살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똑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날은 그냥 넘어가고, 어떤 날은 크게 폭발하게 되는 걸까요?
B씨는 한 물류회사에서 배차 업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화를 크게 냈던 전날, B씨는 새벽까지 배차 일정을 정리하느라 늦게 잠들었습니다. 다음 날에는 피곤해서 평소보다 커피도 많이 마셨습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예전에도 늦게 잔 적 많았어요. 커피도 원래 많이 마시고요."
하지만, 잠을 제대로 못 잔 날에는 평소 같으면 넘길 일에도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2007년 발표된 한 뇌영상을 활용한 한 연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연구에서는, 참여한 건강한 성인들을 대상으로 밤새 재우지 않은 뒤, 부정적인 내용의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잠을 자지 못한 사람들은 감정 반응에 관여하는 편도체의 반응이 더 커졌고, 감정을 조절하는 데 관여하는 전전두엽과 편도체 사이의 연결도 약해졌습니다.
B씨의 격렬한 분노(화)를 '수면 부족'이라는 하나의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원래 같으면 그냥 참고 지나갔을 일을 하필이면 그날은 참기 어렵게 만들었던 여러 요인들 가운데 한 가지로는 의심해볼 수 있습니다.
B씨가 그날 커피를 많이 마셨다는 것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2024년 발표된 한 메타분석 연구에서는, 건강한 성인을 대상으로 카페인 섭취와 불안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 8편을 모아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카페인을 섭취했을 때 불안이 높아지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하루 400mg 이상의 고용량에서 그 차이가 더 컸습니다. 이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은 '불안'이었습니다. 분노를 연구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커피 때문에 화를 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잠을 설친 상태에서 카페인 섭취까지 지나치게 많아지면 몸과 마음의 긴장과 과각성 상태가 오래 남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도 화가 쉽게 치솟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태가 겹친 날에는 감정을 다루기가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약물 복용력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부 약물에서는 초조함이나 공격성, 기분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최근 새로운 약물을 복용하기 시작했거나 용량을 바꾼 뒤 갑자기 분노 양상이 달라졌다면 처방한 의료진에게 알리고 상의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임의로 약을 끊는 것은 피해야 합니다.
B씨에게 이번에 분노(화)가 폭발하기 직전에 몸 상태가 어땠는지 기억이 나는지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그냥 화가 났죠."
B씨는 조금 더 생각해 보더니 가슴이 답답했고 몸에 열이 오르는 느낌도 있었던 것 같다고 했습니다.
간헐적 폭발성장애 환자를 조사한 연구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분노가 터지기 전과 격렬하게 표출되는 동안 감정적으로 강한 분노 뿐 아니라 신체의 각성도도 높아졌고, 스스로 통제하기 어렵다는 느낌도 더 많이 보고되었습니다. 실제로 어떤 분들은 심장이 빨리 뛰고, 어떤 분은 얼굴이 달아오르거나 숨이 거칠어집니다. 어깨나 턱에 힘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이런 신호가 또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매번 이렇게 비슷한 신체 변화가 먼저 느껴진다면, 그 신호는 화가 폭발하기 전에 알아차릴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한의학에서는 몸과 마음을 따로 보지 않습니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도, 화가 치솟는 것과 동떨어진 증상이 아니라 같은 상태가 몸과 마음 양쪽으로 함께 나타난 모습으로 봅니다. 그래서 분노 발작이라는 진단명에 얽매이기 보다는, 현재 이 사람의 몸과 마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먼저 살핍니다.
같은 진단이라도 처방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 사람의 기질과 생활, 지금의 몸 상태까지 두루 살펴 이 상태를 파악하는 과정을 변증(辨證)이라고 합니다. 분노조절장애(간헐적 폭발성장애)도 마찬가지여서, 감정이 쌓이는 과정과 몸에 나타나는 변화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화를 낸다'는 행동 하나만으로 같은 치료를 적용하지 않습니다.
B씨가 뒤늦게 자각했던 가슴 답답함과 열감은, 변증 과정에서 서로 다른 유형으로 나누어지는 단서가 되기도 합니다. 가슴이 막힌 듯 답답하고 한숨이 잦으며 감정을 누르고 지내는 시간이 길면 간기울결(肝氣鬱結), 얼굴이 쉽게 붉어지고 열감이 오르며 조급함과 짜증이 두드러지면 간화상염(肝火上炎)에 가깝습니다. 물론 2가지 증상이 모두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억누른 감정이 오래 지나면 열로 바뀐다고 보아, 간기울결이 간화상염으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보기도 합니다.
2008년 발표된 화병(火病) 변증도구 연구에서도 이 둘을 서로 다른 증상 묶음으로 나누어 구분했습니다. 화병을 다루었던 연구와 변증도구이기 때문에, 간헐적 폭발성장애에 곧바로 옮겨 쓸 수는 없지만, 분노라는 감정을 답답함과 열감이라는 동반 증상에 따라 서로 다른 단계로 나누어 보는 시각에서는 한의학이 이 질환에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조금 전 언급했듯이 B씨처럼 두 신호가 함께 나타났다면, 보다 복합적인 상태로 보고 접근합니다. 한약 처방에서는 기의 흐름을 풀어주어 답답함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되는 약재들, 열을 가라앉히는 데 효과적인 약재들을 함께 처방하고, 그에 맞는 침뜸, 약침 등의 치료를 병행합니다. 동시에, 상담과 한의학적 정신요법 등을 통해 감정을 다루는 법을 익히고, 명상이나 이완요법을 꾸준히 훈련하여 몸의 긴장을 스스로 낮추는 연습을 더합니다. 이렇게 치료를 진행하며 상태에 따라 처방을 조정하고 심리적 접근을 함께해 몸과 마음이 예민해지고 동요되는 폭을 줄여갑니다.
"그 순간에는 좀 풀리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얼마 안 지나서 후회하죠."
분노 발작 전후를 살핀 다른 연구들에서도 B씨의 사례와 비슷한 감정 변화가 보고되었습니다. 폭발 뒤 후회가 더 크게 나타났고, 대인관계나 직장생활, 법적인 문제를 겪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화를 내는 순간에는 긴장이 잠깐 풀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미안함과 후회가 남고, 관계가 어색해집니다. 그 스트레스가 다시 쌓이면 다음 갈등 때 더 예민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반복되는 분노 문제는 "성격이 급하다"며 소홀히 보고 넘어가면 안됩니다.
B씨에게 2주 동안 간단히 기록을 해보도록 했습니다.
잠을 얼마나 잤는지, 커피를 얼마나 마셨는지, 그날 유난히 힘든 일이 있었는지, 화가 터지기 전에 몸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정도였습니다. 기록이 기대만큼 자세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부분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화를 크게 냈던 날 중 두 번은 전날 새벽까지 잠을 못 자 수면이 많이 부족한 날이었습니다. 다른 한 번은 수면 상태는 괜찮았지만 아침부터 배차 상황이 꼬여 하루 종일 업무로 긴장이 많았던 날이었습니다. 반대로 아들과 비슷한 일로 부딪혔는데도 별일 없이 넘어간 날도 있었습니다. B씨가 기록을 보더니 말했습니다.
"딱 하나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제가 더 예민해지는 날은 어떤 날인지 조금 알 것 같네요."
이런 부분이 기록의 목적입니다. 어떤 뚜렷한 하나의 원인을 찾으려 한다기 보다는, 내가 언제 평소보다 화를 다루기 어려워지는지 스스로 알아차리려는 것입니다. 잠을 못 잔 날일 수도 있고, 일이 몰린 날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 조건이 겹쳐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패턴을 알면 화가 올라오기 시작하는 시점을 조금 더 일찍 알아차리고, 치료할 때도 무엇을 먼저 조정할지 구체적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간헐적 폭발성 장애는 잠을 잘 자고 커피를 줄인다고 해서 없어지는 병은 아닙니다. 하지만, 화를 쉽게 내도록 만드는 여러 조건들을 찾을 수 있고, 그 조합을 알아내면 어떤 부분을 조정해야할지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한의학에서는, 수면과 카페인 섭취 같은 일상 습관과 패턴, 몸에서 나타나는 여러 신호들을 한데 모아 현재, 이 사람의 상태를 살피는 정보로 사용합니다. 특정 증상 하나를 콕 집어 누르는 치료보다는, 그 증상들을 만들어낸 몸 전체의 쏠림을 바로잡는 것을 치료 목표로 잡습니다. 같은 상황인데도 어떤 날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가고, 또 어떤 날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크게 화가 나 당황스럽다면, 우선 그 차이가 어디에서 생기는지 일상속을 자세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왜 이것도 못 참을까"라고 자책하고 다짐만 하기보다는 화가 커지기 전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조건과 신호를 찾아보는 편이 훨씬 도움이 됩니다. 또한, 분노가 점점 잦아지거나 강해지고,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 다른 무엇보다 안전이 먼저입니다. 급박한 상황에서는 112나 119의 도움을 받으셔야 합니다.
※ 이 칼럼을 읽어 보시면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시면, 한방신경정신과 진료가 가능한 가까운 한의원을 방문하셔서 분노가 반복되는 상황과 그 전후의 몸 상태를 편하게 이야기해 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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