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신경성실신
미주신경성실신. 신경성이라는 말만 듣고 채혈이나 주사를 계속 피해오셨나요? 유독 그 순간에만 쓰러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올해 스물여섯인 J씨는 채혈실 의자에 앉으면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바늘이 팔에 닿기도 전에 손발이 차가워지고, 귀가 먹먹해지고, 눈앞이 하얘지다가 그대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곧장 응급실로 옮겨져 누운 채로 심전도와 혈액검사, 뇌파검사를 받았지만 모두 정상이었고, 돌아온 설명은 "신경성" 이라는 말 한마디뿐이었습니다.
신경성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왜 하필 채혈 앞에서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 뒤로 J씨는 건강검진도, 예방접종도 차일피일 미루게 되었습니다. "또 그럴까 봐 아예 안 가는 게 낫겠더라고요"라고 J씨는 말했습니다.
"신경성"이라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신경성"이라는 말은 원인을 알려주지 않습니다. 미주신경성실신 중에는 혈액을 보거나 주사를 맞을 때처럼 특정한 자극이 있을 때만 나타나는 유형이 따로 있고, 여기에는 따로 밝혀진 생리적 경로가 있습니다.
미국의 한 연구팀은 혈액이나 상처를 볼 때 실신하거나 실신 직전 증상을 겪은 적이 있는 사람 11명과,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 11명을 모아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두 그룹 모두 먼저 누운 자세로 15분을 보낸 뒤, 침대를 세워 45분 동안 서 있는 자세와 비슷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혈액이나 상처를 볼 때 실신한 경험이 있는 그룹에서는 11명 중 9명(82%)이 이 과정에서 실신하거나 실신 직전 증상을 보였고, 이때 수축기 혈압이 평균 21mmHg, 맥박이 분당 평균 22회 떨어졌습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그룹은 혈압과 맥박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즉, 채혈이나 주사 앞에서 쓰러지는 반응에는 특정한 생리적 경로가 있으며, 단순히 "신경성"이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참여자가 11명에 불과한 작은 연구라는 한계는 있지만, 자극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같은 반응이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진료실에서는 이 기전을 J씨에게 설명해드렸습니다. 이 반응은 두 단계로 나뉜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교감신경(긴장했을 때 심장을 빨리 뛰게 하는 신경)이 반짝 활성화되면서 심장이 빨리 뛰고 혈압이 오르지만, 뒤이어 부교감신경(몸을 이완시키는 신경)이 과하게 반응하면서 혈압과 맥박이 한꺼번에 떨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뇌로 가는 혈류가 순간적으로 부족해지면서 의식을 잃게 됩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 나서 J씨는 그동안 왜 아무도 이렇게 말해주지 않았는지 되물었습니다.
증상이 시작되는 순간 몸으로 할 수 있는 대처법도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한 연구팀은 실신 전 증상을 미리 느끼는 재발성 미주신경성실신 환자 223명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에는 생활습관 교육만 하고 다른 그룹에는 여기에 더해 다리를 꼬거나 팔다리 근육에 힘을 주는 대처법을 훈련시켰습니다. 1년 넘는 추적 기간 동안 실신이 다시 나타난 비율은 교육만 받은 그룹에서 50.9%, 대처법을 함께 배운 그룹에서 31.6%였습니다. 즉, 전조증상을 느끼는 순간 다리를 꼬고 팔다리에 힘을 주는 것만으로도 상당수 실신을 막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한의학에서는 미주신경성실신 처럼 반복해서 정신을 잃거나 혹은, 잘 놀라는 증상의 원인을 한 가지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1. 평소에도 잘 놀라고 가슴이 이유 없이 두근거리며, 낯선 자극 앞에서 유난히 긴장하는 편이라면, 심장과 담(膽)의 기운이 약해 작은 자극에도 쉽게 놀라는 상태, 즉 심담허겁(心膽虛怯)상태인지 먼저 살펴봅니다.
2. 반면 실신 전후로 기운이 없고 식은땀이 나며 평소에도 쉽게 지치는 편이라면 기(氣)가 부족한 상태를 함께 봅니다.
3. 어지럼이 두드러지고 속이 더부룩하거나 메스꺼움이 잦다면 담음(痰飮, 몸 안에 정체된 수분과 노폐물) 상태를 살펴봅니다.
4. 안색이 창백하고 어지럼이 잦으며 월경량이 적은 편이라면 혈(血)이 부족한 상태를 살펴봅니다.
같은 증상으로 와도 함께 나타나는 증상의 조합에 따라 보는 방향이 달라지므로, 채혈 을 앞두고 쓰러진다는 공통된 사실 하나만으로 동일한 처방과 치료법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J씨는 실신 전후로 가슴 두근거림과 긴장이 두드러지는 편이었고, 이 부분을 중심으로 다른 증상들을 함께 확인해나갔습니다.
운동 중에 갑자기 쓰러지거나, 아무런 전조 증상 없이 순식간에 의식을 잃거나, 쓰러지면서 자주 다치거나, 가족 중에 젊은 나이에 갑자기 돌아가신 분이 있다면, 자율신경 반사가 아니라 심장 자체의 문제일 가능성을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J씨는 이런 소견이 없었고 검사 결과도 모두 정상이었지만, 실신이 반복된다면 이 부분부터 확인하고 넘어가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검사상 별다른 원인 없이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현상이 반복된다면 "신경성"이라는 말 한마디로 넘어가기보다는, 어떤 자극에서 어떤 양상으로 몸이 반응하는지를 자세히 관찰하고 진찰받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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