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장애
공황장애를 오래 끌게 만드는 것은 발작의 횟수가 아니라 발작이 없을 때의 예기불안입니다.
"이제 발작은 안 와요. 그런데 지하철은 아직 못 탑니다."
올해 나이 서른아홉, 직장에 다니는 A씨가 하신 말씀이다. 반년 전 출근길 지하철에서 처음 쓰러질 뻔했다고 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이 두근거리고, 숨이 안 쉬어지고,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다고 한다. 그날 응급실에서 심전도와 피검사를 받았고 결과는 모두 정상이었다. 이후 정신건강의학과에서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약을 드시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는 두 달째 공황발작이 없다. 그런데 A씨는 여전히 지하철을 타지 않고, 매일 아침 한 시간 일찍 나와 버스를 두 번 갈아탄다.
"공황장애가 좋아졌다"는 말을 우리는 대개 "발작이 안 온다"는 뜻으로 쓴다. 그런데 진단 기준을 보면 그렇지가 않다.
정신장애 진단 기준(DSM-5)에서 공황장애를 진단하려면, 예기치 못한 공황발작이 반복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발작이 있은 뒤 한 달 이상, 다음의 두 가지 중 하나가 함께 있어야 한다. 하나는 또 발작이 올까 봐, 또는 발작 때문에 큰일이 날까 봐 계속 걱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발작을 피하려고 생활 방식을 눈에 띄게 바꾸는 것이다.
즉, 오히려 발작이 없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가 진단의 절반을 차지한다. 발작과 발작 사이를 채우는 이 걱정을 예기불안(豫期不安, 또 발작이 올까 봐 미리 하는 불안)이라고 부른다. 두 달째 발작이 없는 A씨가 지하철 승강장을 피해 돌아가는 이유가 예기불안이다.
참고로, 2016년에 시행된 국내 정신질환 실태조사에서, 평생 한 번이라도 공황장애를 앓은 사람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0.5%였고, 조사 시점 기준 지난 1년 사이에 앓은 사람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0.2%였다.>
해외에서 공황장애 환자들을 오래 추적한 연구들을 모아 정리한 리뷰가 있다. 이 리뷰가 내린 결론 가운데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서양의학에서 약물치료를 하면 공황발작이 오는 횟수는 비교적 빠르게 줄어드는 편이다. 하지만, 광장공포증(발작이 났을 때 빠져나가기 어려운 장소를 피하게 되는 것)과 전반적인 불안은 그만큼 빠르게 줄지 않는다. 그리고 광장공포증이 함께 있는 환자는 증상이 더 심하고, 병이 더 오래 가고, 치료에 대한 반응도 제한적이었다고 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약은 공황발작이라는 증상의 억제에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걱정과 회피 행동에는 그만큼 잘 듣지 않는다. 공황장애가 만성으로 넘어가는 경로는 발작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걱정과 회피 쪽에 있다.
공황장애 환자들에게 일주일 동안, 하루에도 여러 번, 그때그때 느끼는 불안을 직접 기록하게 한 연구가 있다. 참여한 환자는 21명이었고, 모두 549회의 기록이 모였다. 결과는 두 가지였다. 첫째, 앞서 발작을 겪은 뒤에는 예기불안이 더 강해졌다. 둘째, "그래도 내가 어떻게든 감당할 수 있다"고 느끼는 정도가 높은 사람일수록, 발작을 겪은 뒤에도 예기불안이 그만큼 크게 올라가지 않았다.
발작 자체보다 발작을 어떻게 예상하고 평가하는가가 그 뒤 불안의 크기를 좌우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회피 행동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발작이 났던 지하철 한 곳이다. 얼마 뒤에는 지하철과 비슷하게 중간에 내릴 수 없는 고속버스가 목록에 들어온다. 그다음은 영화관 가운데 자리, 미용실 의자, 사람이 많은 마트, 고속도로 터널 순으로 목록이 늘어난다. 목록에 무엇이 들어가는가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목록이 만들어지는 원리는 같다. 발작이 났을 때 즉시 빠져나올 수 없는 자리는 전부 후보가 된다.
회피 행동은, 공황발작을 피하는데 있어 당장은 유효한 방법이다. 지하철을 안 타면 그날 지하철에서 불안할 일이 없다. 문제는 회피가 남기는 마음 속 결론이다. 피했기 때문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결론만 남고, 지하철을 탔더라도 아무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끝내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예기불안은 검증되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된다. 다음에 지하철 승강장에 서면 불안은 처음 그 크기 그대로 돌아온다.
공황장애로 진료를 받으면 필요할 때 먹으라며 항불안제를 함께 받는 경우가 많다. 알프라졸람(자낙스)이나 로라제팜(아티반) 같은 벤조디아제핀 계열 약이 여기에 해당한다. 실제로 발작이 시작될 때 이 약은 도움이 된다.
한편, 약을 먹지 않고 주머니에 넣고만 다니는 분들도 많다. "이게 있으니까 그래도 나갈 수 있어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렇게 불안한 상황을 견디기 위해 곁에 두는 물건이나 행동을 안전행동이라고 부른다. 안전행동이 있으면 그 자리를 견딜 수 있지만, 견디고 난 뒤에 남는 결론이 "약이 있어서 버텼다"가 되기 쉽다고 알려져 있다. 지하철을 탔다는 경험이 지하철에 대한 두려움을 줄이는 데 온전히 쓰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약을 끊으라는 뜻이 아니다. 벤조디아제핀 계열 약은 갑자기 중단하면 금단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줄이는 일은 반드시 처방한 의료진과 상의해서 천천히 해야 한다.
공황장애의 가장 중요한 표준 치료는 사실 인지행동치료와 노출치료다. 두 치료가 하는 역할은 결국 하나다. 피해 왔던 상황에 차근차근 계획을 세워 다시 들어가고,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경험을 몸이 직접 쌓게 하는 것이다. 두근거림이나 숨 가쁨 같은 감각 자체를 무서워하는 경우에는, 일부러 빠르게 숨을 쉬거나 제자리에서 뛰어 그 감각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효과가 확실한 치료이지만 국내에서 구조화된 인지행동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대부분은 약물을 받고, 예기불안과 회피는 각자 알아서 견디는 경우가 많다.
한의학에서 불안장애는, 좁게는 경계(驚悸, 잘 놀라고 가슴이 두근거림)와 정충(怔忡, 가슴이 몹시 뛰면서 불안한 상태)의 범주에 든다.
예기불안이 남아 있는 시기의 환자는 진료실에서 이런 모습으로 오신다. 잠들기까지 한참 걸리고, 옆에서 문 닫는 소리에도 가슴이 내려앉고, 별것 아닌 일에 결정을 못 하고 자꾸 되묻는다. 이런 상태를 한의학에서는 심담허겁(心膽虛怯, 심과 담의 기운이 약해져 겁이 많아지고 잘 놀라게 된 상태)으로 본다. 여기에 가슴과 옆구리가 답답하고, 한숨이 잦고, 목에 무언가 걸린 느낌인 매핵기(梅核氣)가 겹치면 간기울결(肝氣鬱結, 기운이 뭉쳐 잘 풀리지 않는 상태) 쪽을 함께 본다.
2021년에 발간된 불안장애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은 공황장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있다. 불안장애 치료 약물(정신과 양약)만 쓰는 것보다는 한약을 함께 쓰는 병행 치료를 고려해야 한다고 하였고, 약물과 정신요법을 함께 하는 방안도 권고했다. 한편 한약을 단독으로 사용하기 것보다 이완요법 등을 함께 활용하도록 권한다.
정리해보면, 공황장애에서 이미 약물을 사용하고 있다면, 정신요법과 한의학적 치료를 함께하는 것이 낫다는 결론이다. 실제 진료실에서 만나는 공황장애 환자분들 중 대부분이 양약을 복용하고 계신 상태이다. 발작이 급했던 시기는 이미 약으로 지나왔고, 지금은 발작이 없는데도 하루가 예기불안에 잠식된 상태다 보니 다른 치료를 병행하고자 오시는 분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예기불안이 높은 사람은 늘 몸이 조금씩 각성되어 있다. 어깨와 턱에 힘이 들어가 있고, 숨이 얕고 빠르다. 이 상태에서는 사소한 신체 감각도 발작의 신호로 읽힌다. 이완요법이나 호흡법 같이 몸의 각성을 낮추는 훈련이 예기불안 시기의 치료에 중요한 이유다.
공황장애의 치료 목표를 "발작 0회"로 적으면, 목표를 이루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회피와 항불안제 복용이 된다. 지하철을 타지 않으면 지하철에서 발작할 일이 없다. 목표는 달성되고, 그 대신 갈 수 있는 곳, 할 수 있는 활동이 일상에서 하나씩 줄어든다.
목표를 다르게 적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발작이 오더라도, 이를 감수하고 그날 잡아둔 약속을 취소하지 않고 나가는 것." 이렇게 목표를 잡으면 회피는 더 이상 목표 달성에 도움이 안된다. 무엇을 목표로 하느냐에 따라 회피가 해결책이 되기도 하고 방해물이 되기도 한다.
공황장애 치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시간은 발작이 일어난 10분이 아니라 발작과 발작 사이의 나머지 시간이다.
1) 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 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5th ed. Arlington: American Psychiatric Publishing; 2013.
2) 대한한방신경정신과학회. 불안장애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대구: 한국한의약진흥원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개발사업단; 2021. p.2. (2016년 정신질환실태조사 재인용)
3) Pollack MH, Smoller JW. The longitudinal course and outcome of panic disorder. Psychiatr Clin North Am. 1995;18(4):785-801.
4) Helbig-Lang S, Lang T, Petermann F, Hoyer J. Anticipatory anxiety as a function of panic attacks and panic-related self-efficacy: an ambulatory assessment study in panic disorder. Behav Cogn Psychother. 2012;40(5).
5) 대한한방신경정신과학회. 불안장애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대구: 한국한의약진흥원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 개발사업단; 2021. p.3.
6) 위의 책. p.12-13,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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