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우울증의 또 다른 얼굴, 신체 증상에 대한 칼럼입니다.
진료실에 들어선 그는 앉기도 전에 명치를 문질렀다. 쉰넷, 중견 제조업체 관리직. 3 년째 속이 얹힌 것 같다고 했다. 위내시경은 이후 매 년, 세 번 받았고 세 번 다 깨끗했다. 헬리코박터도 없고, 담낭도 멀쩡하고, 복부 초음파에서도 걸리는 게 없었다. 소화제와 위산억제제 류의 약들을 번갈아 먹었지만 좋아지는 건 처음 며칠뿐이었다. 뒷목이 늘 뻣뻣하고, 새벽 네 시면 눈이 떠지고, 서류 내용이 머리에 잘 안들어와 세 번씩 다시 읽기가 일쑤라고 했다. 기분은 어떠시냐고 물었다. 그는 잠깐 멈칫하더니 웃었다. "기분이야 뭐.. 다들 그렇게 살지 않나요?"
이런 대답은 아주 익숙하다. 그리고 이 대답이 나온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언제부터 안 좋았느냐고 물으면 처음엔 모른다고 하다가, 몇 마디 더 오가면 삼 년 전쯤 구조조정이 있었다거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거나, 아이가 크게 아팠다, 투자를 했다가 크게 손실을 봤다는 등의 말이 나온다. 그러고는 덧붙인다. "근데 그건 지나간 일이고요. 지금은 괜찮아요. 그냥 속이 안 좋은 게 문제예요.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세계보건기구가 열네 개 나라 열다섯 개 지역의 일차의료 기관을 대상으로 진행한 대규모 조사가 있다. 1999년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NEJM)』에 실린 이 연구에서, 우울증 진단 기준을 충족한 환자 가운데, 정작 환자 자신은 오직 신체 증상만을 호소한 비율은 평균 69퍼센트였다. 지역에 따라 45퍼센트에서 95퍼센트까지 편차가 있었지만, 어느 곳에서도 소수가 아니었다. 우울증 환자의 열에 일곱은 우울하다는 말 대신 "속이 안 좋다", "머리가 아프다", "기운이 없다"는 말로 진료실에 들어선다는 뜻이다.
통증도 마찬가지다. 우울증과 통증의 동반이환을 다룬 한 문헌 고찰 연구에 의하면, 임상 환경의 우울증 환자 중 약 65퍼센트가 어떤 형태로든 통증을 함께 겪고 있었다. 두통, 요통, 목과 어깨의 결림, 원인을 못 찾는 관절통. 정형외과와 신경과와 내과를 순회하다가 마지막에야 마음 이야기가 나오는 경로는, 예외적인 사례라기 보다는 표준적인 모습에 가깝다.
한국에서는 이 경향이 조금 더 짙다. 정신과 진단에 대한 낙인, 감정을 언어화하기보다 참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의 오래된 인식이 겹친 결과라는 설명이 제시되어 왔다. 우울감을 우울감으로 보고하지 않는 것은 환자의 잘못이 아니다. 그건 그 사회가 가르쳐준 표현 방식이다.
이 현상을 '심리적 문제가 몸으로 표현된 것'이라 부르면 절반만 맞다. 우울과 통증은 뇌에서 상당 부분 같은 배선을 쓴다. 세로토닌과 노르에피네프린은 기분 조절에도 관여하지만, 척수로 내려가 통증 신호를 눌러주는 하행성 억제 경로의 주된 전달물질이기도 하다. 이 계통의 기능이 떨어지면 기분이 가라앉는 동시에 통증 문턱값도 함께 내려간다. 없던 통증이 생기는 게 아니라, 원래 걸러지던 신호가 걸러지지 않는다. 수면과 소화도 같은 자리에서 만난다. 새벽에 일찍 깨는 조조각성은 우울증의 전형적인 수면 양상이고, 자율신경 균형이 교감신경 쪽으로 기울면 위 배출은 느려지고 장 운동은 불규칙해진다. 내시경이 깨끗한데도 얹힌 느낌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다. 눈으로 보이는 점막의 문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기능 조절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한의학은 이와 유사한 현상에 별도의 이름을 붙여두었다. 울(鬱)이다.
금원사대가의 한 사람인 주진형은 『단계심법』에서 울증을 여섯 갈래로 나누어 기울(氣鬱) / 습울(濕鬱) / 담울(痰鬱) / 열울(熱鬱) / 혈울(血鬱) / 식울(食鬱)의 육울(六鬱)을 세웠고, 이를 다스리는 처방으로 월국환(越鞠丸)이라는 처방을 제시했다. 주목할 점은 순서다. 울의 출발점은 기(氣)지만, 기가 막히면 진액이 돌지 못해 습이 되고, 습이 뭉치면 담이 되고, 담이 오래되면 열이 생기고, 열은 다시 혈과 음식의 정체를 부른다. 감정에서 시작된 것이 결국 형체를 가진 문제로 옮겨간다는 관찰이다.
『동의보감』 역시 내경편에서 기(氣)를 다루며 칠정(七情)에서 비롯된 기울이 진액의 순환을 방해하고 적(積)과 담음(痰飮)을 만든다고 적었다. 목 안에 무언가 걸린 듯한데 뱉어도 나오지 않고 삼켜도 내려가지 않는다는 매핵기(梅核氣)는 『금궤요략』에서 반하후박탕으로 다스린다고 한 증상인데, 오늘날 이비인후과와 소화기내과를 오가는 인후두 이물감 환자의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한다.
물론 이 개념들이 현대 정신의학의 우울증과 일대일로 겹치지는 않는다. 울은 우울증보다 넓고 동시에 다른 지도 위에 그려진 개념이다. 다만 '감정의 정체가 몸의 정체로 이어진다'는 임상 관찰만큼은, 앞서 본 현대 신경생물학적 설명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신체증상은 먼저 오기만 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남는다. 우울증 치료 후 기분은 회복되었는데 요통, 근육통, 복부 불편감, 피로 같은 증상이 남아 있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이 잔존증상은 재발의 가장 강력한 예측 인자로 알려져 있다. 잔존증상이 남은 환자군의 재발률이 완전 관해군에 비해 뚜렷하게 높다는 보고가 반복적으로 나왔다. "이제 우울하진 않은데 몸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가볍게 넘기면 안 되는 이유다.
그 쉰네 살 환자에게 나는 위장약을 더 얹지는 않았다. 대신 언제부터 새벽에 깼는지, 주말에 뭘 하며 쉬는지, 삼 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소화 이야기를 하러 온 사람에게 잠과 감정을 묻는 일은 때때로 무례하게 느껴질 위험이 있다. 그래서 순서가 중요하다. 몸의 증상을 충분히 인정하고 다룬 다음에 물어야 한다. 당신 병은 마음의 문제라고 먼저 선언하는 순간, 환자는 자기 고통이 부정당했다고 느끼고 다시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거나 그 진료실을 떠난다.
몸은 종종 마음보다 정직하고, 대체로 마음보다 먼저 말한다. 검사가 계속 정상으로 나오는데 증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아무 이상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맞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는 뜻일 수 있다.
본문의 환자 이야기는 진료실에서 흔히 마주치는 양상을 재구성한 가상 사례입니다. 우울감이나 신체증상이 2주 이상 지속된다면 혼자 판단하지 마시고 가까운 의료기관에서 상담받으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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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仲景. 『金匱要略』 「婦人雜病脈證幷治」 半夏厚朴湯 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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